커미션 샘플 본문
시끄러운 소음에 커피향이 진하게 묻어났다. 에어컨이 토해내는 찬 공기에 머리가 아팠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카메라를 살폈다. 언제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미리 켜두었지만 5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카페 앞을 지나지 않았다. 나는 어쩔수 없이 카메라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정하는 유명한 아이돌로, 지난 3월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녀는 자신의 팬과 비밀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CCTV에 그녀들의 진한 애정행각이 그대로 찍혀있는것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결국 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이 동성애자 라는 사실을 스스로 밝혔다. 역시나 기사에는 수많은 악플들이 역겹도록 발라져 있었다. 강정하는 그 뒤로 연예계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을 탔다.그 특종은 다름아닌 내가 냈던 것이었으므로, 편집장은 내게 그녀의 근황에 대한 기사를 가져오도록 한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녀가 잠적을 탄 것에 대해 어느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 거절했다. 그러나 편집장은 어차피 누군가 기사를 내게 될 터이니 책임감을 느낀다면, 차라리 내가 좀더 좋게 쓰는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했다. 나는 결국 그것에 수긍하고야 만 것이다.
카페를 나서자 뜨거운 바람이 목구멍에 가득찼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카메라 가방을 옆으로 매고, 종이쪽지에 적힌 주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수많은 기자들의 공세에 못이겨 이사를 갔지만, 나는 집요하게 이삿짐 센터를 전전한 끝에 그녀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을 알아냈다. 이 카페에서 외길로 들어가면 있는 좁은 주택가로, 사람도 없고 집도 작은 곳이었다. 살기에 나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이전에 살던 집과 비교해보면 매우 협소한 곳이었다.
나는 대문 앞에 서서 집의 외관을 천천히 뜯어살폈다. 작은 대문 너머로 좁은 계단이 보이고, 그 위로 퍽 낡아보이는 현관문이 보였다. 나는 누렇게 변색된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오는걸 보지 못했으니, 아직 집에 있을 것이다. 창문은 전부 커텐이 쳐져있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지 다시한번 확인한 후, 바로 담을 넘었다. 바닥에 착지하며 꽤 큰 소리가 났으나, 아무도 보러 나오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없는건가? 나는 현관문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좁은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강정하씨. 강정하씨. 목소리를 좀 더 높혔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문고리를 붙잡고 돌렸다. 막히는 것 없이 매끄럽게 돌아갔다. 문은 열려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순식간에 나를 압도했다. 그 기묘한 불길함은 여름의 뜨거운 바람보다도 더 숨을 막히게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폐부를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내부는 차광 커텐으로 가려져있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설거지 하지 않은 그릇들이 싱크대에 올려져있었고, 바닥에는 여러 잡동사니가 널부러져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니, 그제야 나는 썩어가는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집에서 나는 것과는 다른 냄새였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집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카메라에 담겼다. 나는 몸을 돌려 집안을 둘러보던 중, 문이 반쯤 열린 방문을 발견했다. 그 방은 차광커텐이 없는듯 샛노란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방 앞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악취는 더욱 심해졌다. 나는 문고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창문으로 비춰지는 샛노란 햇살이 방을 물들이고 있었다. 햇살이 파고드는 창문을 마주보며, 내게 등을 돌린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투명한 무대위에 서있듯, 발은 까치발을 든 채 허공에 서있었고,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아연질색하여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순간 찰칵. 하고 셔터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오른손은 죽음 따위는 아랑곧 하지 않는다는듯,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내가 사요코를 처음 만난건 버스 안이었다. 찬 에어컨 바람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등교버스. 왼손으로는 의자 등받이를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봉에 매달린 버스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나는 마치 플랑크톤 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사요코는 서있는 내 앞에 앉아있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의자는 사요코의 등이 맞닿아 있는 의자였다. 그녀는 빽빽한 버스 속에서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 처럼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손등에 새하얀 핸드크림을 짜내 바르는 모습을, 또 그 핸드크림의 튜브를 멍하게 보고 있었다. 겉면에 일본어로 '코코넛' 이라고 쓰여 있는, 정직하게 코코넛 향기가 나는 핸드크림이었다. 사요코는 힐긋, 나를 보고는 손을 까딱였다. 핸드크림을 발라주겠다는 요량인지, 다른 손에 그 하얀색 튜브를 들고 작게 흔들었다. 나는 당황해 눈을 굴리다 결국 하릴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애는 내 손등에 새하얀 크림을 쭈욱, 하고 짜주었다. 그것이 마지막 한번 이었던듯 튜브는 지폐처럼 납작했다. 나는 양 손등을 대고 부벼 손에 핸드크림을 발랐다. 어찌나 많이 짜주었는지 손바닥에 미끌 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날 하루 종일 손에서 코코넛 향기가 진동했다. 후에 물어보니 그것은 본토에서 한국 땅에 가져온 유일한 물건이었다고 했다. 사요코는 그것을 내게 짜주었던 것 이었다.
그녀는 학기 초, 우리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들어왔다. 배정된 반은 나와 다른 반이었기에, 나는 애초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같은 반이었다고 해도 그녀를 신경 썼으리란 장담은 하지 못한다. 강당에서 사요코를 소개할때도 나는 의자에 앉아 목이 아프도록 자고 있었으니.
으레 모든 새것들이 그러하듯, 교환학생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사그라들었다. 서양 애 처럼 외관이 눈에 띌 정도로 다른것도 아니었고, 외모가 특출나게 예쁜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한국어도 제대로 할 줄 몰랐으니 그애는 무언갈 할 때마다 매양 겉돌았다는 것 같았다. 그렇기까지 하니 다른 반이었던 나와 사요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지나가며 얼굴을 힐끗 보고선 아 쟤가 그 일본 애 구나. 하는 정도 였을 뿐, 핸드크림을 발라준 그 날 전까진 목소리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뒤로 사요코는 자주 말을 걸어왔다. 내가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걸 안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늘 사람과 대면 하는게 어색하고 불쾌했던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말을 거는 것이 싫지 않았다. 다른 반이었지만 가끔 하교도 함께 했으며, 만날 때 마다 고개 짓으로 인사까지 했다.
사요코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은 사람 없는 놀이터였다. 그네 두개에 나란히 앉아 멍하니 앞뒤로 몸을 움직이다보면 빠르게 해가 저물곤 했다. 사요코는 그곳에서 특히나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자기가 마치 플랑크톤 같다고 했다. 멍하게 수면 위를 부유하는 플랑크톤. 하루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사요코의 말을 들으며 나 또한 그렇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늘 플랑크톤 덩어리였다. 그네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사람 사이에 정착하지 못하는 하나의 덩어리. 정착할 곳은 달라붙어있는 서로밖에 없었다.
학기가 모두 끝난 겨울. 사요코는 말없이 떠났다. 나는 그간 사요코와 각별했지만 사요코는 그러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학기가 끝났으니 돌아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언제쯤 일본으로 돌아간다. 라고 말 한번 해 주는 게 그리 어려웠나 싶었다. 사요코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이별에 관한 이야기도 아닌, 늘 상 말하기를 피하던 처음 만난 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그날 내게 핸드크림을 짜준 일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그렇다고 대답했고, 덧붙혀 쉽게 잊기도 힘든 일이라고도 했다. 사요코는 내가 본인과 닮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무심코 발라주었다고 했다. 정처 없이 헤매이는 표정. 그 외로운 얼굴이 제 피부를 찌르는 듯 했다고. 사요코는 여상스레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마도 나 또한 플랑크톤 같다고 생각했을 것 이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사요코는 남까지 동정할 수 있는 배부른 방랑자였다.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면 희망이 샘솟았겠지. 나는 그 뒤로도 자주 그 섬나라로 다시 돌아갔을 사요코의 옆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를 떠올렸다. 정착할 덩어리조차 잃은 플랑크톤을. 그렇게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코코넛 크림 냄새를 회상할 때 마다 빛나는 초록빛 바다의 수면을.
‘마치 물에서 태어나고 물에서 사는 생물 같았어요.’ 그애의 시체를 본 목격자중 한 시인은 그렇게 증언했다. 그 구절은 「햄릿」의 오필리어에 대한 묘사를 인용한 것 이었으므로, 세간에서는 그녀를 ‘오필리어‘ 라고 불렀다. 부서져 내린 달빛의 조각들과 함께 수면 위를 떠돌던 어둠을 머금은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처염하더라고 했다. 나는 물에 녹아 일부가 사라진 신체들을 보며 인어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이 딱 저 모양 이겠거니 했다. 그녀가 뛰어내린 하천 근처에는 이상 작가의 「날개」가 놓여있었다. 경찰은 유서 한 장도 없는 이 상황에서 그 소설은 자살 원인을 밝혀내는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나 또한 그녀의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몇 달 전, 자살 관련 특집 기사를 맡게 되었다. 기자가 되기 전 소설을 잠시 집필했었는데, 그게 마침 상사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 그는 ‘이런 기사에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문학적 소양이다‘라며 편집장에게 나를 적극 추천했고, 나는 그렇게 수많은 죽음들을 팔아먹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지금껏 수많은 자살들을 찾아다녔다. 그라목손을 마신 독거노인, 성적 비관으로 아파트에서 투신한 고등학생…. 그리고 남겨진 이들. 늘 연예인들 찌라시나 골라 적던 나에게 이 특집 기사란 상당히 좋은 자극이었다. 나는 편집장이 원하기도 전에 더 특별하고, 더 자극적인 기삿거리를 찾아다녔다.
내가 이번에 취재를 해야 하는 그녀. 오필리어는 아직 열일곱 밖에 되지 않는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부여잡고, 사람을 끌어들이면서도, 그녀를 표현할 수 있는 첫 문장을 위해 골머리를 썩고 이었다
그 많은 자살자들의 생애와, 남겨진 이들에 대해 서술하며 나는 자살을 선택한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들은 전부 고통의 단절을 위해 자살을 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달랐다. 그녀에게서는 그 어떠한 고통의 편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인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녀는 죽기 직전 작은 우울감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여느 또래들이나 흔하게 가지고 있는 학업 고민을 했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사춘기를 보냈으며, 사랑은 앓아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집은 꽤 잘 사는 중산층이었고,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의 간섭이 심한 편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다만 자살의 징후라고 생각 해 본다면, 평소보다 조금 더 친절하게 굴었다고 했다. 오필리어는 평상 사색적이고, 혼자 있는 걸 더 즐기며, 처음 보는 타인과는 일체 가까워지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었다고. 그런 그녀가 돌연 떨어진 지우개를 주워주거나, 선뜻 무언가를 빌려주거나 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사소해 친구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시 회상해보면 그 행동에서 작위적인 면모가 없잖아 있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고도 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문제도 없었다. 몇 번의 상담 기록이 있었지만 자살징후는 커녕 요즘 힘들다거나, 우울하거나 하는 부정적인 발언은 없었다고 했다. 나는 조사해온 것들을 정리한 수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살징후가 없는 학생이라도 상담 중 이라면 부정적인 발언은 반드시 하기 마련이다. 힘들기 때문에 하는 것이 상담 아니던가. 나는 분명 상담 중 무언가 일이 있었고, 상담 교사는 그 일로 인해 이렇게 작성 했을 것 이라고 확신했다.
마침 그 학교의 상담교사는 마침 내가 잘 아는 후배였다. 우연인건지, 편집장의 계획인지 알 턱은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면 취재는 훨씬 간편해진다. 나는 이미 아까 그녀와의 술 약속을 잡아두었고, 간단한 안부와 내일 보자는 인사로 전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내일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확실히 정리 한 후에 기사를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벌써 술이 몇 잔 째 인지도 모르겠다. 본디 사람의 혀란 것은 술에 적시면 적실수록 가벼워지는 법이라 했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나는 초조함에 녹음 어플을 켜둔 채 덮어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러다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어쩌지. 정말로 아무것도 없던 것이면 어쩌지. 확신이 점점 불안에 삼켜지고 있었다. 괜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식히려 술잔만 기울일 때 즈음 그녀가 드디어 말을 텄다.
- 자살 할 줄은 알고 있었어요. 그 애.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그녀는 묻지도 않았음에도 자진해서 자살한 그 아이. 오필리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는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양 손을 모으고 있었다.
- 자살할 줄 알고 있었는데. 차마 말릴 수 가 없었어요. 그런 말을 하더라도 보호자에게 말하는 게 옳았던 것인데.
나는 자리를 고쳐 앉는 척, 스마트 폰을 그녀 쪽으로 밀어두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고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재촉하듯, 그녀의 빈 컵에 술을 더 따라주었다. 그녀는 술을 단번에 비우고는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오필리어는 지금껏 그 어떤 위협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자신이 부모님이 이끄는 대로 그저 유복하고, 평화롭기만 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 할 때마다 원인 모를 공허감만이 자신을 집어삼켰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 스스로가 이상의 「날개」와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가 삶을 지속할 의미를 찾지 못한 것처럼, 자신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자신을 데려다줄 수단이라고. 사람은 죽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 선생님은 그런 적 없으신가요. 하고 물었는데,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거기에는 어느덧 그 애의 말에 공감하고 있는 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아이의 말에 긍정하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자살을 지지하는 입장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나는 조용히 스마트 폰의 녹음 어플을 종료했다. 그렇게 말했어도 그녀는 결국 오필리어의 자살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오필리어의 자살을 지지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상담 교사로서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자책하고 있었겠지.
술집을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데려다주겠다는 내 제안을 한사코 거절한 채 그녀는 바쁘게 발을 놀려 제 갈 길을 향해 걸어갔다. 오필리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속내에 감추어두었던 무기력을 마주한 탓인지 비틀거리는 뒷모습에 힘이 없었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녹음했던 내용을 다시 틀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아 술이 깨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시리도록 비어있었다. 오필리어의 삶에 대한 공허가 그녀에게 옮겨간 것만 같았다. 아니, 그 공허함은 옮겨간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느끼지 못했던 본인의 구멍의 통증이 지금에서야 발견 된 것이었다.
나는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녹음된 이야기가 끝난 듯 이어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거리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정적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듣지 못했던 바람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가슴속 구멍을 관통해 지나가는 듯한 바람소리였다.
너는 눈이 내리는 날 마다 그것을 멍하니 처다보곤 했다. 눈을 처음 봤나 싶을 정도로. 넌 그런 눈과도 같았다. 스며들듯 나타나서, 녹듯이 사라졌다. 그런 눈을 바라보며 남에게 파고들지 못하는 자신을 투영해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너는 한참동안이나 눈을 맞고 서있는 날 마다 심하게 앓고는 했다. 눈을 맞아서 그런건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새하얀 벌판에 눈이 쌓이는 소리만이 고동쳤다. 몬스터들도 별로 나오지 않는 추운날이었다. 나는 코트를 더욱 단단히 여미곤 그날 너처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괜스레 감상적이 되긴 하는군. 이런 기분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정적을 깨려 부러 흥, 하고 소리를 내곤 발걸음을 옮겼다. 눈이 짖이겨지며 뽀드득 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리는 눈을 보면 볼수록 꼭 네가 여기 어딘가 서있을것만 같았다. 숨막히는 표정 그대로 얼음조각 마냥 굳어 얌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는 너. 사명과 감성 속에서 괴로워하던. 나는 아직도 너의 망가진 표정을 잊을수가 없었다.
-날 부디 도와줘요 고대인씨.
나는 그것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은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치욕스러웠다. 내가 알고있는 네가 절대 아니었다. 너는 조금 더 숭고한 몸짓을 해야만 했다. 나에게 그것을 더 보여주었어야만 했다. 나는 네가 이겨내길 바라며 너를 돕지 않았는데, 너는 끝끝내 무너졌다. 덜 뭉쳐진 눈처럼 바스라지고, 햇빛 아래에 선 것처럼 녹아내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내내 너에게 매질을 했다. 그 하나하나가 전부 너에 대한 내 원망이었다.
흥, 애초에 그것밖에 안되는 놈이었단 거지.
나는 돌아섰다. 으슬으슬 추워지는것이 조금 더 있다간 몸에 해로울 것 같았다. 나는 그날처럼 눈밭에 너를 두고 돌아왔다. 네가 어떻게 되던지 나는 신경쓸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는 서로 신경을 끄기로 한 사이었으니.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리고 돌아와서 뜨겁게 열을 앓았다.
-
-날 부디 도와줘요 고대인씨.
사흘을 전례 없이 앓았다. 내내 그때의 네 모습을 담은 꿈만을 꿨던 것이 떠올랐다. 엘프가 얹어준 물수건이 마냥 차갑다. 꽤 오랜 시간을 그녀와 함께 했지만 여전히 보살핌 받는것이 영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차마 해산도 하지 못해 밍기적 거리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내 때아닌 감기는 좋은 핑계거리였겠지.
대충 셔츠만 걸친 채 몸을 일으키니 협탁에 코코아가 한잔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보나마나 엘프가 두고 간 것이겠지. 어린애 입맛이라고 놀리면서도 그들은 꼬박꼬박 단것을 챙겨주곤 했다. 단걸 좋아하진 않는다니까. 나는 코코아 잔을 집어들어 입에 대고는 방을 나섰다.
" 아, 애드! 몸은 좀 어때? "
" 네게 걱정받을 정도는 아니야. "
나는 엘소드를 보았다. 묵뚝뚝하게 대꾸했음에도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있었다. 이건 네가 그토록 받기를 원하던 그 눈빛이겠지. 이렇게 간단한 것을 너는 차마 갈망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창가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엘프가 말하길, 내가 앓는 내내 눈이 그치지 않고 쏟아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동안 네가 그 눈밭에 서있었을까. 눈이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 하, 웃기지도 않는군. "
중얼거리며 코코아를 마저 들이켰다. 커피로 달라니까. 입안에 단맛이 가득 찼다. 너와 억지로 한 키스에서도 비슷한 맛이 났던걸로 기억한다.
아, 이건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너는 일부러 네 기억을 가질 수 있는 내게 이런 부탁을 했던거겠지. 어떻게든 제 형적을 남겨보려는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성공적이었군. 아마 이 일만 아니었으면 나는 너를 깨끗하게 잊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을텐데.
나는 대충 마른 세수를 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것을 떠올린 탓인지, 아직 열이 완전히 내린 게 아니었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언짢은 표정을 지은게 보였는지, 아니면 그 특유의 눈치와 직감이었는지 엘프가 코코아를 한잔 더 내왔다. 피곤하지, 마셔.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제 얼굴을 덮었다.
" 엘프, 넌 기억하냐? "
" 응, 뭐를? "
" ...아니, 됐어. 그냥. "
그녀는 좀더 묻고 싶은게 있는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허나 곧 내가 고개를 돌리니 군말 없이 쉬어, 라고 하곤 자리를 떴다. 나는 멍하니 다시 창가를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세상을 하얗게 칠해가고 있었다. 노곤한 몸이 천천히 녹아가며, 의식이 점차 창밖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네 모습을 좇아, 새하얀 눈 속에 파묻힐 네 뒤를 밟으며.
- 날 부디 도와줘요 고대인씨.
- 난 너의 도움이 필요해요.
- 나는...
*
" 날 부디 도와줘요 고대인씨."
" 뭐? "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퍽 파리해보였다. 지친듯 늘어진 눈꼬리가 처량했다. 너는 천천히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 못들었어요? 머리는 쓸만해도 귀는 영 그렇지 못한 모양이네요. 난 너의 도움이 필요해요."
" 흥, 잘 들었거든. 네가 나한테 부탁하는게 흔한 일이어야지."
" 그래요? 그건 그러네요. 나도 내가 고대인씨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될줄은 몰랐거든요. "
" 그래서, 네가 도와달라고 하고싶은게 뭔데? "
-후략
토기가 목 끝에서 부글거렸다.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도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여명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요?"
옆자리의 남자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한학년 아래의 후배였다. 여명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뻗어 화장실 푯말을 가리켰다. 그제야 남자는 작은 탄식과 함께 팔을 놓아주었다.
여명은 변기를 붙잡고 구토를 했다. 내장에 꾹꾹 눌러담은 지독한 알코올을 정신없이 게워내고 나니, 문득 누군가 등을 손바닥으로 문질러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괜찮아?"
담배냄새에 찌든 술집에 드나드는 방탕한 고등학생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앳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발 넓은 친구관계 사이에서도 이런 친절에 파묻힌 목소리는 한명밖에 없었다. 이 한울.
여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러운 변기에서 고개를 치켜들고는 간신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응. 괜찮아. 고마워. 걱정하지마. 대답하려 했지만 잠긴 목구멍 끝에서 겨우 끄집어낸것은 으으윽, 하는 괴상한 신음이었다.
"이걸로 닦아."
한울은 물티슈 봉투를 건네주었다. 새하얀 겉면이 여명의 손에 거칠게 잡히며 바르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윗면에 난 구멍으로 집게손가락을 집어넣고, 엄지로 잡아 물티슈를 한웅큼 뽑아내었다. 두툼하게 잡힌 물티슈는 입가를 닦기에는 아무리봐도 낭비였다. 이한울은 그것에 가담하듯 한장을 더 뽑아내 손수 입을 닦는것을 도와주었다. 한울은 다쓴 것과 아직 손에 들린채 더러운것과 접촉해보지도 못한 것을 모두 잡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여명을 부축해 몸을 일으키도록 도와주며 변기의 물을 내렸다. 그녀는 걱정과 연민, 친절이 담긴 행동에 작은 죄책감을 느끼며 얄팍해진 물티슈를 바라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것들이라도 공기중의 먼지로부터 보호하는 의무를 다하겠다는듯이 끈끈한 덮개는 물티슈 봉투의 구멍을 덮고 있었다. 덮개 위에 대학 입시니 뭐니 하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오늘 아침 학교 앞에서 나누어주던 것 이었다.
의외로, 투박한 면이 있구나. 여명은 그녀의 꼼꼼한 표정을 힐긋 거렸다.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별 말씀을."
여명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물로 입안을 행구었다. 수돗물의 미묘한 맛을 느끼며 거울로 한울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웃음은 꽤 순박해보였다. 갈색의 뭉실뭉실한 머리카락에 둥근 두 뺨이 파묻혀 있었으며, 자그마한 키와 나폴나폴한 원피스가 특유의 귀여움을 돋보이게 했다. 귀여웠다. 그녀와는 다르게.
여명은 한울이 건네는 손수건으로 손과 입가를 다시 닦아내고는 그녀에게 건넸다. 이대로 술자리로 돌아가기에는 어딘가 아쉬웠다. 그녀와는 처음으로 가지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이한울."
"응, 왜그래?"
"나랑 잘래?"
여명은 스스로도 제가 내뱉은 말에 내심 놀랐다. 귀엽고 순박한 타입의 여자애들에게 이런 성희롱은 절대 먹히지 않는 법이었다. 여명은 제 입놀림을 자탄하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한대로 한울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동그랗게 눈을 뜬채 그녀를 바라보고있었다. 당황한 모습조차 귀여웠다.
그녀는 이내 장난으로 치부해버렸는지 강아지처럼 웃었다. 이 방탕하고 막나가는 무리에 그냥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조금 능청스럽게.
"남자애들이 추근대는 것 보다는 여자애가 하는게 기분이 덜나쁘네."
"당연하지. 사타구니만 믿는 놈들보단 내가 훨배 잘해줄텐데."
여명은 나즈막히 웃었다. 한울은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감았다. 고데기조차 제대로 먹히지 않는 직모가 그녀의 손가락에는 잘만 감겼다.
"네 옆자리 애가 너랑 자고싶어 하던거 같던데."
게다가 잘생겼고. 한울은 덧붙혔다.
그녀는 한울이 에둘러 거절하고 있다는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여명에게는 어딘가 표독스러우리만치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풍겨오는 자스민 향과 동시에 그녀는, 또한 한울이 이런 농담을 절대 기분나빠 하지 않는다는것을 알았다. 여명은 한울의 조그맣고 따듯한 손을 잡으며, 거칠고 굳은 살이 배긴 커다란 그의 손을 떠올리며, 붉은 빛의 입술을 핥으며, 날카롭게 웃으며, 눈웃음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난 연하남이랑은 안자."
그 뒤로 둘은 자리로 돌아와 술을 몇잔 들이키고 적당히 둘러댄 후 시끄러운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점점 외진곳으로 걸어갈수록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현실성도 멀어져갔다.
여명은 솔직히 한울과 모텔같은 곳을 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녀의 중학생같은 외모는 물론이고 자신또한 그리 어른스러운 외모는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들이 술집에 드나들 수 있던것은 어른과 별반 차이가 없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있던 덕이었다. ― 모텔에 가도 거절당할것이 분명했다. 또 술자리를 나와봤자 결국 한울이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울은 자리를 나와 둘만 있게되자 그녀를 이끌고 망설임 없이 집으로 향했다. 여명이 적잔히 당황한 표정을 짓자 왜그러냐 능청스레 묻기까지 했다.
어찌 되었든 도착한 집에서는 진한 자스민의 향기가 풍겨왔다. 집안 곳곳에 디퓨저가 설치되어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집안이 텅 비어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한울은 키스를 해왔다. 순하고 여린 몸체에 비해 키스는 상당히 능숙했다.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공기속에서 한울은 여명을 끌어안고 침대 위로, 이불 속으로 빠져들었다.
적극적이었던 키스와는 다르게 침대위에서의 한울은 꽤나 피지배적 이었다. 그녀는 여명에게 만져달라고 조르거나, 내면 속의 가학심을 자극하는 교성을 곧잘 흘렸으며, 여명의 옷을 벗기거나, 가슴을 가끔 만지작 거리는것 외에는 그녀가 요구하지 않는 이상 먼저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여명 또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결국 일방적인 희롱과도 같은 것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그녀를 유혹하는 솜씨를 보아 한두번 해본것같지도 않았다.
굴곡진 갈색 머리카락이 새하얀 시트와 맑은 피부위로 흘러내린채 몸을 흔들때마다 함께 출렁거렸다. 머리카락조차 이제는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 제 스스로 움직이는 생물 같았다. 여명은 가볍게 침을 삼켰다. 한울의 관능적인 모습은, 음탕했으며, 섹시하고, 타락적인데다가 아름다웠다. 특히나 동성애라는 배덕감이 강렬한 향신료와 같은 자극을 더해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여명은자신이 하고있는것이 마치 성행위가 아닌 조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침대 위에서라면 그 어떤 남자도 손쉽게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가 아무리 지고지순 하려 하는 중년 남성일지라 하더라도. 그녀는 열등감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한참동안의 성행위가 겨우 끝나고 ― 몇번이나 말하듯, 일방적인 희롱과도 같았지만― 둘은 잠깐의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한울은 기다리라며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여명은 방안에 혼자남았다. 그녀는 그 짧은 시간을 멍하니 기다리는것보단 방안을 둘러보는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길을 끄는것은 책상 위 꽤나 고급스러운 외형의 디퓨저였다. 자스민향은 여전히 강했다. 발향력이 좋구나. 여명은 디퓨저를 그에게 하나 선물해볼까 고민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한울의 붉은색 가방을 바라보았다. 살짝 열린 앞쪽 주머니안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깔끔한 물티슈가 들어 있는것이 보였다.
어느새 한울이 방문을 열고 돌아왔다. 알몸이었던 몸에는 커다란 사이즈의 남성용으로 보이는 와이셔츠 한장이 걸쳐져있었고, 작은 양손으로 받치고 있는 쟁반 위에는 연주황색의 액체가 찰랑이는 유리잔 두개가 올려져있었다. 하나를 받아 입에 담자 오렌지쥬스의 씁쓸한 첫맛이 느껴졌다.
"자스민 향이 좋지?"
"그러네, 하나 집에 두고싶을 정도야."
"자스민꽃은 해와 함께 향이 떨어진대."
여명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옆에 앉아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웃었다. 여명은 오렌지쥬스를 다시 한모금 마셨다.
"그래서 밤의 자스민꽃은 꽃으로써의 의미를 잃는다고 그랬어. 우리 엄마가."
조향사 이시거든. 한울은 덧붙혔다. 여명은 오렌지 쥬스를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수면 위로 형광등이 비추어졌다. 조금 흔들자 가라앉았던 침전물이 다시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유리잔의 밑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밤의 자스민꽃은 향기를 벗은 알몸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별로 더는 듣고싶지 않은듯 여명은 대충 대꾸했다. 남은것을 훌쩍 마셔버리고는 그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날로그 시계의 바늘은 12시를 거의 안되게 가리키고 있었다. 여명은 몸을 일으켰다. 이내 한울의 와이셔츠를 보고 아빠의 것이냐 묻자 도리질을 하고는 남친셔츠, 하고 답했다.
"남자친구 있었구나."
"응. 아쉽지는 않나보네."
여명은 뒷말을 무시해버리곤 입가를 핥았다. 덤덤하게 대꾸했지만 죄악감으로 입안이 씁쓸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교복을 꺼냈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는 사복을 챙겨 가방안에 쑤셔넣고는 교복을 차려입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부모님한테 말해서 자고가지 그래?"
"음… 안돼. 오늘은 가봐야 할 것 같거든."
"그래? 아쉽네."
데려다 주겠다는 그녀를 한사코 거절하고는 가방을 챙겼다. 몽실몽실한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렸다. 여전히 귀엽네. 여명은 몸을 돌려 현관을 나섰다.
-후략